레미콘 차는 달리며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달리는 시간에서야 그는 굳을 준비가 되는 것이다.
이 머릿글은 화가 김양훈을 소개하며 가장 먼저 비유로 떠오른 현상이자 작업이다. 실로 적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양훈의 전시를 한마디로 함축할 꼭 맞는 말이다.
레미콘은 주문받은 콘크리트 양생작업을 쉬지 않고 달리며 공사장에 도착하자마자 잘 섞인 콘크리트를 거푸집에 쏟는다. 그 작업으로부터 수백년 위용을 자랑하는 마천루가 솟는 것이다. 김양훈의 이번 작업도 그러한 쉼 없는 질주의 노력끝에 탄생하였다. 또한 이번 전시 준비를 하면서 준비하고 발견한 화법과 연구의 결과, 작업의 탄성을 다음 전시로 일찌감치 구상하고 기획하며 일부 전시물의 밑그림도 그려두었다. 정말 건축작업의 기술이자 공법인 레미콘 차량의 움직이며 작업하는 꼼꼼한 시간과 소성의 법칙을 이리 잘 설명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 이는 김양훈 작가의 특성을 한마디로 나타낼 닮은 꼴이라는 측면에서 자꾸 언급되는 상징이자 찬사일 것이다.
잉어라는 존재는 분명 살아 있는 신화다. 돈 들여 산 먹이를 던져주며 아이고 어른이고 잉어들과 눈을 맞추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이들을 해하려고 낚싯줄을 드리우거나 떡밥을 바늘에 꿰지 않는다.
이 모든 수식어의 밀착은 화가 김양훈에게만 가능하다. 이달 2월 20일(수)부터 25일까지 갤러리 인사아트(인사동길34-1)에서 열리는 전시작가 김양훈을 두고 한 말이다.
그의 이번 전시는 지금까지 해왔던 작업과 연동되면서 전혀 차원이 다른 기법과 표현력이 드러난다. 지난해와 그 이전 두번의 한전 아트센터 미술관에서의 연속 전시로부터 쉬지 않고 이어온 전시인 이번 전시는 다르면서도 같은 결을 가지고 있다. 앞서 설명한 레미콘 트럭 양생 기법 작업처럼 굳지 않게 흔들리며 연속 해 온 결과다. 따라서 이번 전시와 다음 전시도 역시 같으면서도 다를 것이다. 이는 명약관화하다.
이는 레진을 사용하거나 투명한 굳히기로 잉어가 노니는 모습을 영구적으로 판에 박아둔 듯한 이번 전시물의 표현을 포함한다. 비유이자 문학적 수식어인 달리며 굳히는 그의 중단 없고 지치지 않는 작업형태가 그의 그림의 다른 차원을 의미한다. 이는 발전적인 변화를 내포한다.
또 하나는 전시가 분명한 마티에르의 변화가 보인다는 것이다. 단순한 것이지만 작가들만이 느낄 수 있는 작업의 가치와 편이성, 그림작업이 재미를 느끼는 단계에 이른 것이 보여지는 것이다. 두툼하고 거무스레하던 잉어는 새롭게 환골탈태한 듯 비상하는 태도를 취한다. 마치 욕망하는 춤 같다. 이제 이 욕망과 꿈들이 꿈틀 댈 최적의 노닐 장소를 제공하기 위하여 레미콘은 가장 양생이 잘 된 시간의 흔들림을 제 자리를 잡고 쏟아내기만 하면 된다. 김양훈의 마천루와 잉어들이 등용문을 오르는 장면을 리얼하게 볼 수 있다. 신비의 순간인 것이다. 이번 전시의 과정과 그 열림의 순간을 이리도 길게 표현하게된다.
이번 전시 잉어들은 육중하고 힘이 가득했던 거무티티한 숫컷이 새악시를 만나 가정을 꾸린듯 화사하다. 단란한 가정 속의 희노애락이 드러난다. 그 가족애를 동반한 잉어의 여유자적한 유희의 순간은 지느러미와 긴 수염, 천사 같은 날개가 달린 새로운 잉어의 품종을 탄생시킨 작업의 결과다. 흐느적, 가녀린 붓터치가 만든 움직임의 눈부심이 먼저 보인다. 유약하지만 스스로 깨우쳐 힘을 비축하고 에너지를 더욱 가늘게 소비하는 자아항진성을 발견한 잉어 세계가 구현된다.
갇힌 어항이 아닌 자연에서 노니는 진정한 잉어의 놀이터를 선보인 것이다. 달리며 그의 소임을 다하는 레미콘처럼 그리며 스스로 화폭의 도를 깨친 53세 김양훈 작가의 물흐르듯 긍정의 철학이 그리만든 것이다. 유리가두리가 아닌 손만 뻗으면 잡히는 신기루의 꼬리가 주는 미끄럽고 신비한 촉감과 버추얼리얼리티(VR)의 증강현실이 실현된다. 잉어들이 관객을 보고 관객은 잉어들을 서로 보는 듯 유려한 몸가짐을 살랑댄다. 그들의 눈은 어느덧 우리 눈처럼 흘기고 애원하고 유혹한다. 둥지를 튼 건강한 가족 속에서 모자람 없이 자란 잉어군(䀓群)에서나 나올 수 있는 생동감이다.
지난해 전시까지 선보인 잉어의 움직임, 지느러미 모양, 눈 등을 최대한 잉어와 가깝게 친밀하게 그렸던 컨셉에서 작가적 해석을 거둔 자신감의 획득을 꾀한 것이다. 기운은 더 강하게, 화면을 응시하는 관찰자의 마음은 더 가볍게 헤아린 것이다. 보는 행위가 신명나고 몰입을 가져오게 된다. 수십차례 한 동작을 드로잉 한 뒤에야 캔버스로 옮기며 그는 작가의 마음과 관객의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작업에 임하였다. 작업의 가치를 나눔과 공유에 둔 것이다. 바로 레미콘에 양생재료를 쏟아 붇는 작업과 같았다.
그가 붓으로 전하려는 감정의 교류 순간, 멈춤이 표현한 가장 엄선된 캔버스의 결과물들만이 이 전시에 선보였다. 꿈틀대며 같이 작업중 생겨난 아이디어와 소성물들은 아직 그의 작업실에서 양생중이며 육양중이다. 고착화된 작업물을 모두 들고 나오는 욕심도 버린 것이다. 작가의 철학이 얼마나 변한 것인지 고스란히 노정되는 전시다.
그 철학의 정수인 ‘흐르는 느낌’의 잉어가 탄생했고 그는 마음껏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 날아오르도록 했다. 김작가가 대학에서 고전민화를 접한 뒤 판화와 서양화를 거쳐 미디어아트를 섭렵하고 지금의 작업형태에 이른것 역시 쉬지 않고 우리에게 달려온 레미콘의 회전속 작업의 결과로 그 힘든 여정을 잠시 쉬는 중간 선보임 같은 전시의미를 담는다.
두꺼운 마티에르와 색상의 폭 넓은 선택으로 화폭의 농도와 명암은 더 짙고 농후해졌다. 선상(禪床)의 그곳으로 자꾸만 눈길이 가는 관객 욕망의 꿈틀대는 체험감을 주려는 듯한 기묘함 느낌을 준다. 기존 김작가가 그린 매난국죽, 그리고 잉어들의 종합판타지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작품전 전시 타이틀이 그것을 자각하게 한다. <꿈틀대는 행운>
작가가 지난 전시 말미 느끼고 심지를 굳힌 이 전시 타이틀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더욱 <꿈틀대는 幸運>의 진면목을 알게하였다. 궁즉통, 무엇인가 그의 작업은 대중과 통하게 하는 무엇인가를 가진다. 견고한 콘크리트가 결코 가질 수 없는 부드러운 융합과 조화가 있다. 이상을 실현하고 현실에서 쌓아 올린 틀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자연스러움 그 자체다. 그의 작업들을 대표할 촌철살인의 움직임이 이번전시에 나타나는 이유다.
신비의 물고기들이 노니는 반짝거림과 투명한 장소를 보여주는 그의 작품세계가 또 어떻게 흐를지 자못 궁금하다.
김작가가 처음 접한 동양화에서 다작의 반복작업을 염두에 두고 임한 판화, 그리고 그 둘을 합한 서양화 기법에서의 다양한 마티에르와 오브제의 사용, 그리고 잉어와 사군자발견, 나아가 십장생의 살아 있는 생명성을 위하여 고민한 미디어 아트로의 작업 방식에 이리는 이동과 탐색은 레미콘의 질주와 같다. 흔들리며 섞이는 움직임과 그가 아끼는 대상에 대한 온전한 표현만을 연구하고 매진한 부지런함이 일군 결과다.
꿈틀(Frame for Dream), 그리고 꿈틀대는 민초들의 욕망이 긴 겨울 기지개를 켜고 넘실댄다. 꿈속에서의 뒤틀림 혹은 욕망의 나래가 고스란히 전시장에 투영된다.
그들 잉어들과 십장생들의 움직임과 어우러짐은 ‘사랑의 울타리’로부터 항거하는 민족의 100년 전 노도 같은 느낌도 주었다. 온갖 수식어와 수사학을 동원해도 유려하고 자유분방한 캐릭터의 잉어들과 수생 동물들을 빠짐없이 표현 가능 할 것 같다. 가늘고 얇은 꼬리는 척추로부터 흔들이고 춤춘다. 척추를 지휘하는 것은 물고기의 뇌다. 이번 전시에서는 뇌의 움직임과 감정을 눈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고 신기한 경험이다. 미술이라는 장르가 가진 ‘본다는 것의 체험’과 잔상이 주는 여운이 눈과 뇌를 통하여 전이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뇌를 쉬지 않고 같은 궤적을 그리며 손과 팔을 흔드는 작가의 얼굴이 짐작된다.
꼬리와 날개, 지느러미, 아가미, 턱 옆의 수염 할 것 없이 모두 숨 쉬는 작가의 손과 뇌를 따라 흔들리듯 분명 그도 춤추듯 유영할 것이다. 잉어작가 김양훈의 레진과 미디엄 겔을 이용한 다음 작업이 기대되는 지점이다. '지금에서 미래를 본다'라는 말이 이해가 되는 전시.
<강익모 ace컬럼니스트, 전시미학비평가, 서울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