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눈과 귀, 몸의 세포 하나 하나를 통하여 모든 사물과 현상을 직시하는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빛을 가두는 상자(빛을 머금은 공간 혹은 방)라는 뜻의 카메라 옵스큐라(Camera)에 천착해 시대에 순응하고 잊혀져 가는 인간들의 군상 속에 주목할 만한 가치와 존재를 드러낸 연극 작품이 화제다. 그 작가는 작품을 일구는 철학의 한 가지를 들어 유독 그 필요성을 강조한다. 연극 <어둠상자>이야기다.
이강백은 카메라 초기단계 카매라 루시다부터 스코토포러스를 지나 이안 렌즈의 롤라이 플렉스, 폴라로이드에 이어 1회용 카메라까지 시대를 가르고 공간을 현상화 시켜 인화를 해 나간다. 무대조차 거대한 카메라 주름 틀인 것을 보면 작가가 상상하는 카메라는 분명히 데카르트의 시간이나 아인슈타인의 시간개념을 비유적 역사관에 투영한 것일 것이다. 이러한 행위를 ‘본다는 것과 기록한다는 것’의 차이와 본질에 견주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대사와 역사의 관계 속 알레고리를 리얼리티와 관객의 지식적 기억에 호소하며 설득하는 형식을 띄었다. 특히 한 가문의 내력을 통하여 비타협의 근원 속에 녹여내는 방식을 택하였다. 작가나 관객과 함께 역사의 재현무대인 카메라 주름상자인 빛의 바늘이 쏘아진 시간을 거슬러 과거에서 출발하여 현재로 돌라오는 여정의 형식을 사용하였다. 현존했던 과거 비극의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이것이 실제인지 가상의 스토리인지 구분이 어려운 모호한 어떤 것으로 만들었다. 등장인물도 사실적으로 존재한 실존성과 극작을 위하여 꾸며낸 인물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여 카메라의 초점을 관객이 스스로 맞추도록 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극중 등장인물이 가상의 인물인가 하고 방심하면 어느새 역사 속 인물들이 툭하고 튀어 나와 사건의 고삐와 우리가 아는 역사의 결과를 잇게 만든다.
작가는 관객과 함께 퍼즐을 맞추어 나가고 주인공의 가족들을 결국 이름만 가족일 뿐인 프로타고니스트를 미국으로 보내어 극의 끝을 설명하는 화자가 되게 만든다. 이강백 작가가 이제 노년기의 노련함을 보이는 완숙의 경지에 접어들었음을 엿보는 대목은 그의 정반대 이미지에서 구축되는 새로운 발상이다. 즉 카메라라는 이미지를 이야기하며 그는 음악의 중요성과 소리가 주는 단절되지 않는 맥을 포착한다. 단절과 맥을 잇는다는 새로운 화두의 작품 <어둠상자>는 이런 구 한말 역사의 긴장과 이완 속에서 생각 해 보아야 하는 공연이다.
본다는 것의 차이와 본질은 별로 어려운 것이거나 거창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존심의 문제이자 국민을 통치하는 최고의 수반이 되면 고민할 큰 명제적 문제였다. 그러나 일개 조그만 점(點)에 가까운 주인공은 존재감을 그 명제보다 더 크게 생각하게 만든다. 황제다운 존재감이란 무엇일까? 자금성의 옹정제나 강희제의 초상화에서는 황제다운 존재감의 기준을 느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동양에서 찾기 힘들다면 미국 달러나 각국의 지폐를 장식하는 영웅이나 지도자의 얼굴은 리더 다운 면모나 풍모를 지닌 것일까? 미국의 두 루즈벨트 대통령의 사진을 기억하는 이보다 ‘테디베어’의 신화를 기억하는 이가 더 많은 것을 보면 그도 아닌듯하다. 이는 국가 수반의 근엄한 표정보다는 그가 남긴 말이나 행동, 실천의 역사와 시간이 신화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역사가 되어 후세에 전해진다는 것은 일시의 영욕보다는 긴 안목의 군주가 지녀야 할 만백성을 도탄에 빠트리지 않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하는 면모에서 발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강백 작가는 덕수궁 석조전에서나 궁 옆의 시립미술관에서의 전시에서 영감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전시와 사진을 ‘본다’는 것은 상징적 기호에서 사고로 유추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작가와 이수인 연출이 같이 바라 본 지점은 볼수 역사의 단절에서 비록 변화를 거치기는 하지만 사라지지 않고 희미하게나마 존재하는 어떤 한 ‘절대적 명제의 굴곡’을 소리로 이어내고 무대 위에 구현하는 아이디어가 콘텐츠로 형성되는 ‘고집의 자존심’찾기였을 것이다.
이것을 찾기 위하여 김솔지의 다양한 악기와 엄태훈의 세련된 기타 아르페지오가 구현의 실마리를 감성적으로 이끈다. 거기에 정영 무대 디자이너는 작가의 카메라에 대한 공상에서 현실적인 고증과 형상화의 부피를 관객의 머릿속에 실체화 해낸 일등공신이다. 뿐만 아니라 소품 디자이너 박영애의 리얼리티와 우스꽝스러운 풍자는 혹자에게는 한줄기 눈물을 자아내는 오브제로 작동할 수도 있다. 또 한 극중 첼리스트의 등장은 의미심장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육손이’는 사진을 찍는 장애에 아무런 장애가 없지만 근엄한 고관대작들의 국가관과 정장을 차려입은 신지식인들의 가당치 않은 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한 결손이자 가문의 전통이 된다. 전통의 변이된 가치와 사라진 전통에서도 명맥은 ‘고집’에서 오히려 탄생한다.
이 고집이야말로 가진 자나 부와 명성에 빌붙은 자들의 철학을 비웃을 수 있는 ‘선한 장애’로 탈바꿈 된다. 이는 결손을 지닌 수많은 문학적 영웅들의 구체화이며 엔터테이너로 재탄생하는 콘텐츠의 힘이 된다. 선한 시간과 선한 복종을 살아낸 민중과 복속들의 고지식한 순수들에 대한 위로와 애정을 긴 작품의 여정은 마침내 설득해 낸다. 자결, 멸시, 대리모를 찾아야 하는 역사적 시간의 흐름은 주군의 자존심을 되찾는 용기의 발로, 궁핍의 반전이다. 극중 역사적 상처를 지닌 연상의 여인에게서 위안과 위무의 발로를 찾는 증손주에 이르기까지 육손이 김규진은 우리사회에서 점차 희귀종이 되어가고 있지만 필요한 존재이다.
송흥진, 백익남, 신안진, 이춘희, 김승언, 이길, 이현호, 박창순, 강지완, 고애리, 윤다홍, 장한새, 이진주, 김치몽, 장승연 등 배우들의 다역 캐릭터는 바로 팔천만 민족을 대변하는 어둠상자가 찍어 낸 박물들이다. 이강백 작가와 이수인 연출의 복선이자 ‘공간에 가두어 둔’ 밀착중인 빛으로 지금 현상을 기다리고 있는 필름일지도 모른다. 2019년 이후 대한제국을 잇는 대한민국의 ‘자존감’의 이미지는 과연 무엇일까?
12월 2일가지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강익모-ace에이스 컬럼니스트, 공연예술평론가, 서울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