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로스코가 입에 문 담배 끝이 붉게 타오르며 극이 시작한다. 그의 들숨에 빛이 강해졌다 그가 입을 떼면 빛이 잦아든다. 허나 담배가 언제까지나 타오를 수는 없다. 흰 막대는 몇 번의 호흡 끝에 수차례 붉은 불빛이 되었다 이내 하얗고 검은 잿더미 위로 흩날린다.
사진 = 신시컴퍼니 제공
연극 <레드>는 추상표현주의 대표 화가인 마크 로스코와 가상의 인물의 그의 조수 켄의 대화로 구성된 2인극이다. 로스코가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 포시즌스 레스토랑에 걸 작품을 의뢰 받아 40여편의 작품을 완성한 후 돌연 계약을 파기해버린 일명 ‘시그램 사건’을 중심으로 극은 진행된다.
“자식은 아버지를 몰아내야해. 존경하지만 살해해야 하는 거야.” – 마크 로스코
레드는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 작품이다. 색면 추상을 이용한 작품으로 일약 스타 예술가로 올라선 마크 로스코는 그의 선배들인 입체파의 피카소와 초현실주의자들 등을 잔인하게 몰아낸다. 자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을 알고 있는 로스코는 ‘그렇게 잔인했어야 하냐’는 켄의 질문에 프로이트의 말을 인용하며 새로운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니체와 프로이트, 융 그리고 셰익스피어 등 수많은 인물들의 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영감에 의해서 그림을 한 터치 시간을 들여서 그리며 그림이 수용자와 소통하고 수용자 속에서 고동치는 작품을 만들고자 하였다.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만 흥미가 있던 그는 그는 외부 효과를 줄이기 위해 철저히 자연광이 배제된 작업실에서 빛을 통제하고 영감에 맞추어 수없이 색깔을 덧칠하여 그림을 완성했고 수용자가 18인치 뒤에서 그림을 감상하도록 하는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하는 등 수용자의 능동적이고 진지한 참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마크 로스코는 머지않아 앤디 워홀과 리히텐슈타인 등이 이끄는 팝아트의 물결에 왕좌를 내어주게 된다. 위풍당당하게 선배들을 몰아내던 진보적인 모습과는 달리 그는 어느새 챔피언 타이틀을 지키려는 기득권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게 된다.
“그들(팝아트 작가들)은 선생님처럼 잔인하지 않기를 바라요!” – 켄
팝아트는 진정성이 없다며 비판하는 로스코와 신세대를 대표하며 팝아트를 옹호하는 켄은 내내 각자의 시대를 대변하며 열띤 논쟁을 펼치고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과정 속에서 오히려 자신들이 두려워한 색에 대한 어려움을 떨쳐낸다.
사진 = 신시컴퍼니 제공
“넌 지금 처음으로 존재했다.” – 마크 로스코
이 대목에서 왜 극이 담배를 태우며 시작했으며, 전자담배를 사용하는 공연 추세에 맞지 않게 전자담배가 아닌 연초를 태우는지, 또한 몇 안 되는 팜플렛 포토에 로스코의 그림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오브제가 담배인지 선명하게 나타난다. 로스코와 켄은 각자 죽음을 블랙과 화이트에 투영한다. 죽음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은 불꽃 같이 치열한 예술 논쟁을 통해서만 비로소 태워 흩날릴 수 있기 때문이리라. 담배는 빛이 날 때 의미가 있듯이 켄이 격정적이고 주체적으로 예술에 대해 논할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기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이 같이 흰 캔버스를 붉게 물들일 때는 정말 압권이다. 쉴틈 없는 붓질 소리에 다들 숨을 죽이고 예술 작품이 하나 만들어지는 것을 지켜본다. 비록 시작점이 다르지만 결국 한가지 작품으로 만나듯 세대 간의 갈등도 결코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기 위한 과도기적 현상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흰 담배가 붉게 타오르듯이 순식간에 캔버스가 물드는 것은 이 극의 최대의 볼거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림과 색에 대한 연극인만큼 색의 은유에 대한 대사가 넘쳐난다. 레드가 도대체 다홍이냐 크림슨이냐 하며 레드의 정의를 묻는 질문에 나지막이 ‘떠오르는 태양’이라 대답한다든지, 그 이후로 서로 쏟아내는 레드에 대한 기표들이 죽음과 생명으로 상반된 위치에서 시작해 나열하다 보니 결국엔 둘 다 생동감이라는 한가지의 개념으로 수렴되는 장면에선 붉음의 정도가 시각화되어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런가 하면 로스코가 말하는 레드의 비극이란 관객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기본적인 철학 소양을 바탕으로 비극을 온몸으로 마주할 때 떠오르는 영감을 붓에 담아 한 겹씩 더해가며 그린 그림은 부르주아들의 입맛을 가시게 만들고 절망에 부딪쳐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도록 새로운 세계를 제시한다. 모든 그림엔 비극이 빠져서는 안되고 그것이 모든 것을 이루는 근간이 된다는 것이다.
마크 로스코가 거액을 받고 포시즌스 레스토랑 벽에 걸 연작들을 그려줄 것을 수락한 것은 예술의 상업성에 극구 반대하는 그의 철학과 반대되어 보여서 마치 금전적 유인으로 인해 신념을 버린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이면에는 부자들을 골탕 먹이고자 하는, 혹은 로스코가 바라는 방향인 벽 너머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사고의 깊이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물론 그것도 실현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돌연 계약을 파기해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대신 극 중 로스코가 간절히 바라던 대로 그는 1964년 그의 그림을 건 예배당을 만들게 된다.
“밖으로 나가!” – 마크 로스코
“레드!” – 켄
자신의 예술 활동을 돕느라 정작 자기 그림을 그리는 데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켄을 위해 로스코는 결국 그를 해고하기로 결심한다. 구세대인 자신을 도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예술 사조를 접하며 노동이 아닌 소통으로 예술 세계를 이어가라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사진 = 신시컴퍼니 제공
담배에 이어 다른 여러가지 무대적 장치와 의상 또한 연출의 의도를 곱씹어보는 데에 굉장한 재미를 주었다. 캔버스를 걸어놓을 프레임을 켄이 직접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틀에 갇힌 켄의 관점을 형상화 하거나, 저렴한 중국집 면요리를 통해 포시즌스 레스토랑과의 대비를 하였다고 생각된다. 또한 흰 티를 입고 워커를 신은 채로 작업실로 들어온 켄이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을 도울 때는 신발이 한번도 바뀌지 않지만, 로스코가 해고하는 장면에서의 켄의 신발은 흰 계열의 스니커즈였다. 그는 노동으로서의 예술이 아니라 세상을 만나고 향유하는 예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의상 소품팀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보게 된다.
무대 중앙에는 항상 그들의 상태를 암시하는 그림이 걸려져 있다. 그들의 갈등이 심화되는 장면에는 레드에 블랙이 섞여 있지만(물론 켄은 반대로 해석한다) 갈등이 완화되고 서로의 두려움을 쫓아낸 후 절정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거대해진 강렬한 레드 캔버스가 놓여져 있다. 로스코가 조금씩 다가가자 조명이 약간 바뀌어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문양과 색감이 나타난다. 끝없이 덧칠한 그의 작품의 깊이, 층위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끝까지 자신의 비극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로스코의 예술 세계에 어느 누가 박수를 보내지 않으랴.
연극 ‘레드’
공연날짜:2019년 1월 6일-2월 10일
공연장소: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공연시간:100분
관람연령:만 14세 이상
제작진:연출 김태훈/무대 여신동/조명 나한수/분장 백지영/의상 임경미/소품 최혜진/음향 지승준/무대감독 이승철
출연진:강신일, 정보석, 김도빈, 박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