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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오페라의 중흥을 꿈꾸는 고집

라벨라 오페라단 이강호단장을 만나다

등록일 2018년12월11일 01시21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그는 우선 이태리에서 ‘극장 시스템’에 눈을 뜨게 된다. 성악을 공부하고 잘 나가는 스승 들 밑에서 배웠지만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면 흔한 말로 ‘필’이 꽂히는 분야가 있었다. 이태리에서 제일 잘된 극장들을 자연스럽게 돌아보다가 문득 한국의 오페라 현실이 눈에 밟히더란다.

 

  사단법인 라벨라 오페라단 이강호단장의 이야기다. 그는 회상하기를 “제가 유학할 때만 해도 정말 좋은 교수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태리 가수들조차 러시아 등의 교수로부터 배운다고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강호단장이 당시 최고의 실력자들로 시끌벅적 하던 이태리의 유명세가 유럽 전역과 미국 등으로 흩어지고 독일, 프랑스 등 오페라 시장이 부상하였음을 상기하며 한국의 오페라도 그 틈새공략이 가능함을 지적 한 것이다.

 

이태리의 독주 시기였던 1960년대 오페라의 전성기는 자신이 유학을 하던 시기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그야말로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본고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사할 만한 교수가 없다”는 말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쇠락(衰落)을 지칭했다. 이런 대화는 모두 한국의 오늘 시점의 오페라 현상과 비전을 논하며 나온 우려와 기회를 나타내며 흘러나온 대화중 일부였다.


 

  세종문화회관에서 2018. 12월 5일 <그랜드 오페라 갈라Ⅲ, 오페라 속 춤과 노래>를 시그니처 시리즈로 공연 한 이강호단장을 인터뷰했다. <피가로의 결혼>, <로미오와 줄리엣>, <제비>, <파우스트>, <라보엠>, <오텔로>, <카르멘>, <일트로바토레>, <아이다>까지 출연진만 220명, 70인조 오케스트라로 꾸며지는 갈라 무대를 공연하느라 바빴던 이단장과의 만남은 예술의 전당 앞 라벨라 오페라단에서 두 시간여 진행되었다.

 

그를 가수로 불러야 할지, 오페라 단장으로 부를지 아니면 오페라 아카데미로 후학을 기르는 교육자로 불러야 할지 잠시 호칭을 정리하기도 했다. 게다가 대한민국 오페라 70년사를 정리하고 국내 오페라계를 가장 최근까지 돌아본 ‘한국오페라의 70년사’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것까지 기억이 떠 올랐다.

이강호의 다양성은 그의 배움에 대한 욕심에서도 비추어 볼 수 있다. 한양대 음대졸업 후 G. 니콜리니 국립음악원, M. 마지아 시립음악원, C 베르곤지, 지찌아나, 스파지오 무지카 아카데미 등을 섭렵했다. 그 후 피아젠짜 Theatro Munucipare를 다니며 <코지 판 투테>로 1997년 데뷔했다. 그후 유인촌이 연출한 푸치니 <라 보엠> 에 로돌프, 시인을 맡으면서 프로 첫 발을 내디뎠다.

 

  2015년 5월 11일 중랑구민회관에서 신영조 교수를 모시고 가정의 달 콘서트를 주관한 이강호단장은 집념이 강하고 곧은 성격을 지닌 의리파로 보인다. 그가 어린 시절 만난 한 장면과 오버랩된다. 충주 신영조교수가 독창회에서 <꽃>을 부르며 그랜드 피아노 앞에선 모습에 감동해 화동으로 꽃을 선사 한 어린이가 성악가로 성장한 영화 같은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결국 신교수에게서 배운 음악으로 다시 중랑구민회관에서 갚음을 하는 모습이 유추를 가능하게 했다. 마치 영화장면 같은 이 두 장면은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와 발레를 하셨던 어머니를 집요하게 설득하여 레슨비를 받아 성악으로 진로를 향한 사람의 이야기다.

 

  그 이후 그는 공부 잘하는 학생에서 노래를 잘하는 학생으로 바뀌었다. 이대웅, 중앙콩쿠르에 입상한 후 반대하신 아버지를 겨우 설득해서 허락을 받고 한양대로 진학하게 된다. 당연히 신영조교수가 있는 그곳에 차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그후 ‘라벨라’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여정을 떠나게 된다. ‘라벨라 보체 앙상블’이라는 이름으로 목소리를 강조했고 벤칸토를 택하였다. 그가 강조하는 ‘목소리주목 오페라 철학’의 아이템에 신영조교수에게 홀린 그처럼 이강호선생의 제자가 ‘자본을 대겠다’며 나섰다. 그래서 ‘벨라’라는 홈페이지 도메인을 얻으려 하였지만 누군가의 선점으로 결국 ‘라벨라’ 오페라단으로 등재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페라 전문 잡지도 해 보고 싶었고 기타 오페라 사업을 하고 싶었던터라 ‘벨라’앞에 붙은 정관사 격의 ‘라’와 만나 운명 같은 생명력을 얻었다.


 

  벨칸토 발성과 당시 대가들이 많이 계셨던 이태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무대가 되었고 ‘라벨라가 될 벨라’의 포부를 달성시킬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김자경 오페 오페라단외 서울오페라, 아시아오페라단 등 정도가 있었으나 현재의 위상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그는 밀리노의 베르디로 입학을 하며 <토스카>의 ‘별은 빛나건만’ 등의 곡을 부르며 푸치니의 레퍼토리를 익히고 배우려했다. 그러나 모짜르트 전문인 그의 교수는 카를로 베르곤지 등의 가수들과 공부하고 싶었던 이단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두 가지 사유로 다시 팔로마로 진학을 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삐아진체 콘서바토리를 접하게 되었다. 당시 둘째 아이 육아문제 와 더 좋은 스승을 찾아 가게 된 것이다. 이후 1991년부터 지금까지 28년의 기간을 성악가로 유영하게 된다.

 

  이처럼 배움의 자세도 음악을 대하는 그의 자세도 진지했다.

맹렬히 한국 오페라 시장에서 공격적인 타이틀들을 무대에 올리고 적극적 마케팅을 하는 것을 두고 “도대체 이강호단장이 누구인가” 하는 의구심들이 많았다. 오페라는 투자금 회수가 관건인데 든든한 후원자가 있는가가 궁금했을 터였다.

그는 후원자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했다. 동원AHE라는 발전 기계를 만드는 중소기업 대표이태용사장을 이사장으로 모셨다며 적자를 메워 나가게 되는 장면에서는 사뭇 가슴이 찡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이단장. 이태용대표는 교회 장로이면서 일을 상의하면서 만나게 되었고 운명적으로 자신을 후원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이사장 52세 때 이 단장은 40대였다. 나이의 소다를 떠나 조언을 하고 경영을 상의하며 라벨라를 점차 ‘문화의 꽃’ 오페라 계의 빌전으로 노력을 합치게 된다. 아리엘 합창단의 이야기와 일트로바트로의 실패 때 이야기가 잠시 대화를 숙연케했다. 삼억의 적자가 났을 때 이사장은 우선 필요한 금액을 묻기에 “그게 손해를 보았다”고 얘기했더니 그 자리에서 5000만원을, 또 며칠 후에 다시 5000만원을 주며 “더 못해주고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며 인간의 감동이라는 것을 경험한 케이스였다고 했다.

화력발전 터빈 기계를 생산하는 후원자는 지금도 후원을 하고 계시지만 그때 주신 격려는 “나에게 기필코 오페라단을 운영하며 오페라극의 내용 같은 ‘잊을 수 없는 은혜’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게 했다며 단단한 결심의 계기가 되었다고 회상했다.

 

  현재 라벨라 오페라단의 이사장은 공석이지만 자본주의와 예술가치의 구분이 잘 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이태용 전이사장 같은 분을 만나기는 더 없이 힘들 것으로 전망했다. 수입차 구매와 오페라계에 기부를 하는 것을 비유하는 것은 말이 쉬운 일이지 그리 흔치 않은 일이라고 진단했다. 메세나 기부를 국가의 정책이나 문화를 관장하는 부서에서 정책적으로 개발하고 확장시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필자와 이단장은 공감했다. “영화계의 상영일수 쿼터처럼 순수예술에 대한 국가 정책적고민이 제고되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면 국립오페라단의 예산도 넉넉하지 않지만 오페라 지원금의 대부분이 국립단체와 시설에 집중되고 오페라인 협회와 민간 오페라의 예산은 극히 제한적임을 계산으로 설명했다. 최근 K-POP이 엄청난 관심과 세계적인 진출을 불러 오듯 한국의 독자적인 예술과 수많은 음악학도들의 재능이 한 나라의 고귀 한 문화정수의 핵심이 되려면 오페라의 가치를 가지는 일 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프라인 협회’(회장:김향란 국민대 교수)를 만들게 되는데 앞장선다. 이는 ‘한국 오페라 70주년 사업회’의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오페라와 연관된 기술, 학문 등 모든 분야에 예술가들 스스로 힘을 합쳐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막연한 유토피아적 이상이 아니라 끔찍하고 맥 없는 오페라계오하 한국의 예술계가 뭉텅이로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

 

 어둡고 격한 분위기를 낮추고자 “오페라를 하지 않았으면 무엇을 했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기자 생활을 하고 싶었다“라며 자신은 음악을 전공하는 기자나 그중에서도 오페라를 취재하는 기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답한다. 골수 오페라 팬이자 음악인인 셈이다. 이내 대화는 암울한 후배 음악가들과 후학들의 실태로 이어졌다. 한 해 국내 약 2000명의 음악전공 학생들 중 많아야 1~2퍼센트 정도의 학생들만 스타의 반열로 가고 그나마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나머지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박경준 선생이 말하길 한국의 오페라가 이제 ‘구조 조정에 단계’로 들어섰고 음악대학이 없어지거나 줄어드는 상태를 경험해야 한다“는 다소 격한 비판이 있음을 전했다.

 

  그 논리로 단순히 음대에 진학하고 음악을 전공했다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음악진로 접근법을 유도해야 하는 단계가 되고 음악적 시장을 세그멘트화 하고 세분화된 새로운 지표를 4차산업 혁명시대의 예술계 환경으로 새롭게 부각할 필요를 역설했다. 예를 들면 성악뿐만이 아니라 다른 음악적 장르를 개척하거나 콜라보레이션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저에는 개런티 200만원을 20년 전에 받았다면 지금은 50만원밖에 받지 못하는 시장상황에도 불구하고 경쟁자는 많고 홍보나 기회포착을 잘 하는 이들 때문에 연주비나 사례비는 더 추락한다는 것이다. 그 해법으로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외국 무대로 곧바로 진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단장의 아들의 경우를 설명했다.“한예종 졸업 후 스위스 바젤의 오페라하우스 극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며 현장스탭의 일과 꿈을 실현하는 현실성을 체득하는 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학생들을 오페라나 음악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만들고자 하는 학부모들을 계몽시켜야 한다는데 포커스를 맞출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 큰 무대와 현장을 마음껏 보고 음악의 핵심인 ‘노래를 잘하는 사람’, ‘연주를 잘하는 사람’, ‘음악인 다운 실력을 키우는 것’이 국내 음악 시장의 규모를 체계화 하는 것이며 교수나 연구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일부 교육적 코스를 더 밟아서 목적 달성에 다가가게 하자는 것이다. 80년대 사고방식을 가지고 적체된 인원을 해소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이르렀기 때문이다. 음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많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련의 몇 편 정도씩의 오페라가 그저 봄가을에 극장을 채우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페라의 교육적 효과에 대해서는 대학 강의 안에 안주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21세기형 커리큘럼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세부적으로는 오페라를 위한 커리클럼을 일목요연하게 만들고 다양한 케이스를 만들어서 대학수학 기간중 교양을 배우게 하는 것 이외에 춤, 시, 문학, 그리고 제대로 된 발성 기초가 탄탄하게 만들어지게 하는 특화된 오페라 학교와 독립된 시설들을 만들기를 희망했다. 외국의 경우 콘서바토리 형, 한예종의 예술 전문 영재교육기관으로서의 실습 그리고 실기 위주의 인재를 개발하는 것에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술의 전당과 같은 크고 실제적인 공연장 등이 프로와 학생들이 섞여서 공연하는 곳에서 실습을 해야 하고 인턴 과정으로서 제대로 된 극장을 느끼고 피부로 학습하는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던 무대는 보잘것없고 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유학이나 기타 여러 실습과 연수프로그램을 거쳐야 한다며 “우리는 그러한 인재를 찾는데 수많은 시간 낭비해야 하고 그들은 비용과 막대한 시간 낭비를 또 한 번 하게 되는 것”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산학의 성공적인 케이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실습과 극장 그리고 프로들이 멘티와 멘토가 되는 정책과 발상의 전환으로 공무원들의 각성이 일어나고 공무원들이 반드시 문화와 예술을 알아야 하는 역량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가 시설을 운용하는 이런 케이스를 개발하고 공유해한다는 점은 현재처럼 대관 사업에 몰두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가적 예술 분배 체계를 당장 멈춰야 한다는 역설의 다름 아니다.

 

  “오페라계의 고질적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너무 많은 오페라가 무분별하게 올려지고 있다라고 얘기를 했다. 국내 동종분야 95퍼센트에 이르는 민간 오페라단 200여 개가 국가 예산 가운데에서 몇 퍼센트를 지원 받는지를 보자며 다시 서슴없이 손을 꼽았다. “국가의 지원금 중 대구오페라 축제에 10억, 그리고 서울에서 열리는 한국 오페라 축제 팔억을 지원하는 것 외에 그외 모든 비용은 국립오페라단이 대부분 가진다. 국립오페라단이라 할지라도 지원금과 에산이 충족한 것은 아니다. 하물려 민간 오페라단의 경우 질적으로 떨어지는 작품들이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무대에 올려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향 평준화로 가고 있는 것이고 오페라의 양보다는 질적인 측면을 이제는 고려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스칼라나 뉴욕 메트 오페라 같은 이런 오페라계 내에서 자정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 콘텐츠에 입각해서 무대화 가능한 케이스를 만들면서 프로다운 의식과 스스로의 질적인 도약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끼리 끼리 모여서 “오페라 한편 했다”라는 결과에 안주 하면서 실적을 위한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것보다 김자경 오페라단 시대의 몇 안 되는 오페라단 활동 때처럼 훨씬 진지하게 접근하는 것이 오리지날리티가 느껴지고 오페라존재가치를 높여준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후죽순으로 관변 단체나 민간 오페라단에서 검증이 되지 않은 그런 오페라를 만들어서 무대에 올리는 것은 한국 오페라를 후퇴 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이단장의 지론이다. 지금보다 점점 더 낮은 질의 오페라만 양산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의 증빙현상이 한국에 올 수 있는 외국인 연출가나 지휘자, 성악가를 예를 들었다. 유명한 가수를 초빙치 못하는 이유가 일 년 정도 뒤의 스케줄관리를 내다볼 수 있는 시스템만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즉 유명한 레퍼토리를 가진 사람이나 유명한 스타들은 이미 삼년 내지 사 년 뒤의 스케줄까지 꽉 차 있는데 일 년이나 육개월 전 대관 신청을 하고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의 오늘날 오페라계 현실은 암담하다는 것이다. 설사 대관이 되고 지원이 되었다하더도 외국의 유명한 스타급 성악가들과 기량이 좋은 오케스트라를 초빙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누가 한국 음악계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올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겨우 올 수 있는 사람들은 한때 유명했지만 지금은 쉬고 있는 사람들이나 예전의 명성이 기댄 사람들이다. 작금의 현실은 이를 잘 활용해서 홍보 마케팅에만 급급해 그들의 이름을 시설 좋은 시스템이나 다른 마케팅 요소로만 부각시키는 반복적 패턴을 게속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오페라가 아닌 게스트위주의 무대를 볼 수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음악학도 나 젊은이들에게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프로그램이나 현장에서의 공동 제작프로그램을 통해서 최적화를 경험하고 또 새로운 창의적인 방법과 시스템을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스급한 일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정부의 오페라 정책이 좀 바뀌어야 하는데 “한국 사람이 없는 외국 극장이 없을 정도로 우리 많은 젊은이들과 음악인들이 외국에 나가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후학들이 외국에서 기량을 닦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이 일할 수 있는 극장이 적거나 외국에서 배운 재능을 다시 쏟아 부을 장소가 얼마나 있겠는가? 라고 하는 대목을 힘주어 말했다. “긴 안목으로 한 나라의 문화와 예술정책의 효율성을 고민해야” 한다는 말을 다시 강조했다. 여러개의 오페라와 음악관련 직책에 교육적 문제도 고뇌하는 음악인 다운 면모를 새삼 보여주었다. .

 

  그가 예시한 사례를 들어 보자. 한국에서 지금 각광받고 있는 K-오페라의 경우 그리고 한류처럼 잘 만들어서 해외로 진출하려면 메트로폴리탄이나 다른 해외 유수의 극장처럼 시스템의 변화와 국가의 거시적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오페라 대관 사업을 위주로 하는 우리 극장 시스템으로는 백년이 넘는 시간동안 축적된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서구의 오페라와 견줄 수 없다는 것이다. K-팝이나 대중문화위주의 한류를 국가가 지원하고 만드는 것처럼 우리의 자체적인 공연의지를 주목해달라는 것이다. “민간 오페라단이 한국 일본 밖에 없는 특수한 현실상과 뛰어난 한국인들의 음악적 성향을 반영하고 예술가들의 높은 역량을 정부가 인식하고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관심을 갖고 경청하고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1948년 1월 16일 민간 오페라단이 만들어진 이래로 70주년이 지난 이 시점에 해외에 우리 작품들이 뮤지컬이나 영화처럼 역진출 할 수 있는 케이스를 만들고 그 역량을 키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문화가 먼저 해외에서 한류 문화사업을 펼치고 있을 때 꼭 같은 눈높이와 같은 실력의 고급문화인 오페라도 동등하게 인정받을 때 국가의 문화적 위상과 밸런스가 맞아지게 될 것이다. 케이팝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케이오페라 역시 많은 인프라와 전공인력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발상의 구체화를 위하여 ‘오페라극장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며 오페라극장 시스템 에 맞는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스텝 관리도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대관 위주의 오페라극장 효용성은 해외 유수 극장과 거리가 멀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의 영상화 사업과의 협업처럼 일반 극장에서 상영하거나 DVD나 블루레이, 디지털음원으로 확대보급하는 케이스도 예를 들 수 있다. 특히 메트로폴리탄의 경우 하루 두 번의 공연 시스템을 가지고 무대를 순식간에 바꾸는 전문적인 스텝이 상주하거나 혹은 관광 마케팅과 연계한 백스테이지 투어 같은 것을 보여주는 시스템은 우리나라도 할 수 있는 것들이고 실제 <정동극장>이 그렇게 하여 성과를 얻은 사례가 있다. 이는 익숙하고 빠르게 처리하는 우리나라만의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5G같은 발달한 IT와 엄청난 속도의 인터넷 환경과 만나면 현장 중계 같은 한국 오페라가 탄생 할 수 있는 것이다.

 

  오페라 굿즈(연관상품)를 개발한다거나 공연 소프트웨어를 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아시아나 국내 현장 동시중계를 한다거나 전속합창단, 발레단과의 연계 등은 질적 향상과 예술단체 전체적인 예산편성의 증진과 인식개선을 불러올 수 있다. 오페라만이 앙상블과 무대와 디자인, 의상, 조명, 음악 등 최고의 기량이 어우러진 예술종합의 큰 줄기로의 진행이 설정되고 실현가능하도록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00시 합창단은 행사 위주로 무대를 몇 번만 서면 된다”라고 하는 안이한 생각과 예산에 맞춘 행사 위주의 공연 횟수로 전락하게 된다면 곤란하게 될 것이다. 이소영 단장 이후 합창단 시스템은 없어졌다. 민간예술 단체에서 오페라하우스를 만들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현상에서 태어난다.

 

  이강호 단장은 서울의 중심 센터에 민간 오페라하우스를 세우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같은 규모나 형태가 아니라 LG아트센터처럼 기업 사옥들의 리모델링이나 새로 입주하는 기업의 사옥을 만들어서 그속에 두 세 층을 합친 극장형태의 오페라장을 구상하고 있다. 이는 접근성이나 기술적인 문제를 고려한 것이다. 또 도시브랜드와 상징적인 오페라하우스를 만든다는 것이 관광산업과 연계해서도 손해 볼 일이 없다는 판단이다. 단순히 오페라극장을 하나더 만드는 게 아니라 시스템과 대중적 코드가 딱 맞아떨어지는 사설 문화 공간을 하나 더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대한 포부를 이뤄 나가고자 하는 그에게 “대중 문화로부터 오페라가 고루하다고 평가받는 대중성의 문제”를 질문했다. 그는 “음악의 본질에 대한 문제이자 예산이 많이 들어가게 되는 문제와 대중에게 메시지를 주고 볼거리를 주어야 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하는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예산과 오페라의 가치가 동시에 가능성을 인정받을 때 시너지가 생길 것이라는 것이다. 오페라 한편에 들어가는 예산은 다수의 투자자들을 확보하고 여러 예술인들의 스케줄과 극장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에 장기 공연이 어렵다. 극장의 시설의 수준을 떠나서 스칼라 극장이나 메트로폴리탄 같은 도시와 기업, 관람객, 관광객 등과 협력 상생을 하려면 “자본이 크게 들어가는 곳에 자본들이 밀려 들어온다”라는 논리를 적극 홍보하고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이 오히려 먼저 해외 유수의 극장처럼 기업과 도시의 이미지를 위하여 극장을 찾아오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물리적 시간과 환경에 차이가 있지만 우리의 경제수준도 세계 십위권을 들락 날락 하고 있는만큼 라벨라의 오페라 프로젝트들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마케팅을 잘해 낼 가능성은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러한 가능성을 위하여 스튜디오를 만들었다고 한다. ‘라벨 오페라 스튜디오’다. 팔년 전쯤 15명 정도를 선발해 오디션을 통해 실력으로 인재를 뽑아 무료로 가르쳤다. 1월 1일부터 12월까지 매주 몇 회씩 발성과 음악적 효과, 연기, 표정, 극장무대의 효율적 활용 등 기본적인 이론 등을 훈련해 대비를 시킨다. ‘라벨라 성악가’가 탄생하는 비결이다. 게다가 10년째 라벨라 성악 콩쿠르 또한 프로젝트로 만들고 있다. 노래만 잘하는 가수가 아니라 음악세계의 기타 자질을 가꾸는 것이다. 25세에서 35세까지 나이 제한을 두어 기량을 더 높이고자 하는 이들을 선발하고 있다. 십년 동안 배출된 면면을 보면 배이스 양석진(사무엘)이나 소프라노 한은혜 등을 들 수 있다. 오페라 콩쿨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 김종표와 같이 유럽으로 진출해 활동하는 케이스도 만들어내더라는 것이다.


 

  이런 성과는 이강호단장이 주도해서 그랬다는 것보다 스튜디오를 거쳐 간 사람들이 한국오페라의 대표주역들이 되어야 한다는 희망이다. 즉 제대로 된 시스템 하에서 교육받고 노력한 사람들이 인정받는 무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벨라스튜디오 스루를 통해서 나간 출연자에게 교수가 이렇게 질문했다고 한다. “너 얼마 내고 이 무대에 서게 되었니?”

이러한 웃지 못 할 현실 들은 한국의 독특한 오페라 현실의 일부이지만 이제는 정치, 경제 모든 면이 변화와 혁신을 하는 만큼 차츰 바뀌어가고 있는 추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픈 스튜디오는 월급을 주는 것이 외국의 사례이다. 큰 무대에서 기관들의 후원을 받아 치른다는 인상만을 주지 말고 라벨라 시스템을 통용시키자는 것이다. 소극장 무대 등에서 우리 시스템을 거쳐서 똑똑하고 현명한 방법으로 열심히 연습하는 분위기가 생성이 되고 있고 해외 에서 좋은 연출자들과의 경험을 갖고 온 젊은 성악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이제 새로운 오페라 70주년을 맞는 활황기의 모습들이 되고 있다는 것인데 1948년부터 생긴 오페라단 수보다 2008년 이후에 생긴 한국 민간 오페라단체가 더 많다라는 것이 방증이 다. 지난 60년보다 최근 십 년 동안 오페라단에 대한 필요성과 사회의 인식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이에 대해서도 이강호단장은 “오페라의 형식 파괴에는 반대한다. 그러나 오페라가 연출 기법에 있어 예전 오페라 전통만 고집한다거나 비정형의 현대적 형식만 고집하는 스타일을 중시하는 것 역시 반대한다. 왜냐하면 ‘팝페라’나 퓨전형식의 융복합 공연만이 새로운 장르라고 하면 오페라가 주가 되는 것이 아닌 구색만 갖추는 형식이 되어 본질이 변질되기 때문이다”고 했다. 따라서 오페라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페라가 저질화 되는 것이 아니라면 오페라 스타가 만들어지는 것을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오페라가 대중문화속에서 사랑을 받으려면 스타가 있어야 관중들이 모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연중 몇 편이라도 공연을 하면서 과외로 용·복합 행사를 연다거나 국가가 시도하는 여러행사로 협업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으나 ‘본연의 전통오페라’ 그 자체가 힘들다고 수백 년 된 오프라의 가치를 흐리고 변형만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한복’을 입는 것과 같다라고 강조했다 예상 가능한 무대, 말하지만 시즌제와 같은 것을 공표하고 이 시스템에 맞춰서 수년 뒤를 내다 볼 자체 제작 시스템과 예산확보, 스텝 훈련과 충분한 기간 준비나 홍보 등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힘들게 만들어진 후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가는 안정 된 루트의 개발로 전 국민이 골고루 고급문화인 오페라 예술을 즐기도록 하는 것이 오페라관련 인재가 도태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막아 낼 수 있는 대안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오페라의 교육적 시스템이 장사에만 치우쳐 전락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이라는 것이다. 이의 실례로 2019년 3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지원작으로 <검은 리코더>라는 창작 작품이 준비 중인 것을 들었다.(한국문화예술 올해의 창작산실 발표 참고, 11월 20일 시어터 카페에서 24개 지원작 발표와 소개)

한국 최초의 예술인지원으로 오페라가 탄생하는 셈인데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70여 명 정도의 규모로 준비된다. 예술지원단체의 회계연도 덕분에 쫓기게 되는 것이 그나마 내년 3월로 준비할 기간이 있어서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2019년도 11월 22일과 24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도니제티의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초연으로 올린다. 뉴욕오페라단이 <로베르토 데버루>와 더불어 ‘여왕 삼부작’으로 칭한 이 공연에 공을 들이고 있다.


 

  내년 라인업의 하이라이트는 2020년 오페라 세 편을 약 한 달간 공연하는 준비작업이다. 오페라 세 편을 가지고 30일 동안 대관을 해서 21회차 공연을 하게 되면 한 작품당 일곱 번 정도 공연을 하게 되어 약 40억짜리 프로젝트 공연으로 다양한 세계의 오페라를 한 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나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강호단장의 아이디어와 경험치가 오페라단체를 운영해 가면서 얻게 된 수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 등 특정한 도시나 지방이 독일의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처럼 기획 할 수 있는 시스템도 이러한 창의적 발상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지방의 신축 문예회관 등 하드웨어 극장들이 다양해졌기 때문에 이런 공연순회 시스템은 수도와 지방자치단체, 오페라단이 서로 윈윈하는 케이스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한 도약을 위해 관리와 경비문제를 고민하고 실험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클래식 엔터테인먼트’를 만들고 있다. 오페라의 중심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두고 시스템을 나누는 방안이다. 예를 들면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오페라단에게 수주를 주는 방법과 또 하나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오페라단의 수주 방법을 강구하려 한다.

키즈 오페라단의 경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어린이 오페라 무대를 만들어서 엔터테인먼트화 하는 것이다. 오페라를 엔터테인먼트처럼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의 시스템을 오페라 하게 도입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린이 뮤지컬의 성공적인 케이스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측면이 많다는 것이다. ‘렉쳐 콘서트’를 교육인프라 구축으로 이끈다거나 혹은 기업연수, 교육적 학습 자료로 활용하게 되는 레파토리 콘텐츠를 강화하는 것이다. 유튜브나 동영상 활성화로 ‘오페라 읽어주는 가수’와 같은 프로그램은 단순한 강의나 교육 형태를 지나 저작권이 충분히 마련되는 오페라 이미지들로 다양한 저변 사업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덟 개 정도의 아이디어를 열정적으로 설명해 나가며 라벨라오페라단 창단 후 11년 동안 의 다수 콘텐츠를 정당한 방법으로 활용하고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려는 그의 진지한 자세가 그가 지닌 고집의 한 단면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세계 무대에서 한국 오페라 대상을 <안드레아 셰니에>로 받은 적이 있고 2018년도에서는 중앙일보에서 주는 국가브랜드 대상을 수상한 경력이 운이 좋아 얻은 것만이 아닌 노력과 고민이 깃든 상처와 영과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 비평가협회에서 주는 음악대상을 수상을 한 케이스 등은 평생에 한 번 오페라를 군민 회관과 같은 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을 위해 ‘찾아가는 오페라 시스템’을 구상 한 결과이고 지역에 새로 생긴 극장과 문화센터들의 훌륭한 하드웨어를 이용한 대중화 작업은 다운사이징화 된 좋은 공연을 지역민들에게도 보여주려는 의지의 ‘나눔정신’이 낳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어디를 가나 “오페라가 너무 어렵다”, “오페라를 대할 기회가 너무 적다”와 같은 오페라를 어릴 때부터 봐오지 않은 관객 개발이나 예술적 학습요구도가 없었기 때문임을 알게 된 데서 기인한 것이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오페라 장면이 장르의 경계를 넘어 대중들이 접근하기 쉬운 환경을 노출하게 되어 명곡 위주의 세 곡 정도만 가지고도 유튜브 같은 곳에서 확산의 기재로 활용할 수 있음을 시험해본 이단장의 교육적 오페라 활용론이다. 교육적 효과와 일반 대중들의 오페라 견인차 역할을 할 만한 프로그램개발이 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기획을 위한 인재 영입에도 공을 들여 H 카드회사 문화프로그램사업을 총괄했던 싱크탱크를 얻게 되었다. 이단장과 이 싱크탱크의 목적은 “오페라계에서 70세까지 노래하고 활동하면서 존경받는 이름을 남기는 사람을 탄생시키고 뭉치게 하자”는데 합의했다.

새로운 기획자들과 더불어 오페라에 대한 아이디어가 멈출 날이 없는 재미난 예술장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꼭 증명해내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는 이단장의 아내 역시 성악가이다. 안팎으로 자신을 지지하고 이해해주는 주변의 도움이 “기적이다”라고 답변했다. 더불어 “오페라를 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준 분들에 대한 감사의 보답을 꼭 해야 된다”라고 하는 사명감과 겸손함을 마음에 심었다고 했다. 그러한 보은의 첫 발걸음으로 ‘한국 오페라인 협회’를 만들게 되었고 체계화가 되어서 2020년 1월 16일을 오페라의 날로 선포하게 되어서 레드 카펫을 깔고 싶다고 희망과 추진사항을 언급했다.

  모두가 오페라 극의 주인공처럼 나비넥타이와 드레스, 청바지를 입고 나와도 괜찮겠고 사회적 존중을 받는 오페라인들의 화합체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오페라를 사랑하는 이면 누구든 참여 할 수 있는 오페라인협회는 71년을 넘어 100년의 한국형 오페라의 창의적모델 산파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한 마디 거들었다. 실제적인 오페라전문가가 일할 수 있고 공연하는 곳에 학교(Academy)가 있고 학생들의 실습과 인턴 과정도 중요하지만 오페라 역사와 이론, 기법, 인문학적 가치와 음악적 기능과 축적을 위하여 오페라학회가 마련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이에 “제대로 된 극장을 느끼고 피부로 학습하는 시스템 만들기에 병행할 계획이다. 학교무대는 보잘것없고 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또 유학이나 또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오페라인발굴 인재풀은 시간과 비용의 낭비다”라고 답했다.

  한국형 오페라의 성공적인 케이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젊은 예술인들의 실습과 극장순응, 경험 많은 프로들이 멘티와 멘토가 되는 인맥의 효과적 기능, 문화담당 공무원들의 각성이 일어나고 그들이 예술을 알고 이해해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 만들기가 급선무라고 생각한다며 오페라학회가 그 선도적 역할을 끌고 가는 형태가 되면 금상첨화일 것이라고 끄덕였다.

  그래서 종내에는 대관 사업에만 몰두하는 국가적 예술 분배 행위를 멈추고 너무 많은 오페라가 무분별하게 올려지는 관행을 검토하고 그 예산의 적절한 재분배가 필요하다고 했다. 국공립 기관이 가져가는 국민의 세금인 예산이 하투루 쓰이는 만큼 질적으로 떨어지는 공연작품들이 대부분이며 민간 오페라단의 의지와 기회는 줄어들게 되고 결국 퇴행으로 귀결되는 작품들이 무대에 서게 되는 악순환을 것이 막도록 하는 모델의 개발도 학회가 할 일이라고 보았다

지금까지의 하향 평준화로 가고 있는 오페라계의 양적 추구를 떠나 이제는 질적인 측면을 정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오페라계 내에서 자정할 수 있는 노력과 그 프로그램에 입각해서 운용되는 무대만을 ‘고집’하겠다는 이단장의 입에서 처음 스스로 언급하는 고집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강익모-ace컬럼니스트, 공연예술평론가, 서울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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