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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용 백공미술관장 개인전

한가람제7전시실, 행성과 자연 닮은 철학

등록일 2019년01월27일 23시45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박종용 개인전-한가람 미술관 7전시장

내가 미학을 알게 된 것은 사막에 가서야 얻은 깨달음이었다. 황량한 사막의 모래 위에도 바람과 시간이 만든 풍문(風汶)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곧 바람이 지나갓음을 증빙하는 흔적이었고 보는 이가 유추해 떠올려야 하는 시간의 마술이자 기록이었다.

하지만 풍문은 미학으로서의 시각이 아니고서야 오늘날 우리가 곤욕을 치르며 혐오하는 미세먼지의 주범일 뿐이니 사물과 현상을 아름답게 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처럼 깨달음 뒤에야 미학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알 수 있는 오브제가 돌, 나무, 흙, 풀 등이다. 이들은 깨달음 이전엔 그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산소 같은 역할들을 제각기 한다.

미술가가 우주의 먼지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작업은 무엇이 있을까? 박종용이 이에 답한다. 한가람 미술관 제7전시실에서다.

아폴로가 달에 간 이후 수십 년 만에 중국의 ‘창허4호’는 달의 뒷면으로 날아가 앉았고 미국의 큐리어스는 지금도 화성에서 이곳저곳을 골라 다니며 탐험 중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신화와 과학의 대립에서 세속적 인간들은 과학의 힘에 더 손을 들어주며 즐겨 사용하는 SNS를과학의 산물임을 당연시하며 신화를 고전속의 콘텐츠로만 인지하고 있다.

하기야 시리(SIRI)가 음성 하나만으로 길 찾기 며 욕구다스리기 등 잔심부름을 다 해주는 시대에 우리는 또 다른 과학과 인간의 균형에 대한 경중의 고민을 할 필요가 있을까?


 

박종용은 종교나 인간의 관계도 형식적이 되어가며 눈치 보는 미학과 예술계에 당연시 요구되는 것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전시를 보여줘 우선 내심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한가람 미술관 제7전시실 내설악 백공미술관 장인 ‘박종용개인전’이 바로 그것이다. 박종용 전(展)을 보는 순간 우주의 질서가 예술계에 살아남아 환속되는 과정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즉 애벌레에서 나비로 화해가는 시간의 변화와 그 작업속의 변형의 과정을 발견하게 되는 느낌을 얻는 것이다. 우주의 티끌과 먼지가 굳어 만들어진 돌, 그 돌이 일군 별, 행성 등은 우주의 가스와 먼지덩이가 자란 것이다. 그 돌덩이의 이름은 지구라 불러웠고 그 위의 토층은 흙이라 불리엇다. 풀 등은 물과 화합하여 흙이 빚어낸 나무로 성장한다. 박종용은 이들의 질서에 미를 발견하고 다시 질서에 옷을 입히고 자양분이 되는 흙에서 자란 것으로 천을 만들고 그 위에 문양과 그림을 정성들여 넣었다.

 

박종용은 적당한 태양 그리고 푸른빛이 만들어내는 오브제를 천연덕스럽게 사용한다. 그의 우주 세계는 정갈함과 정성 그 자체다. 혹 미술사를 전공한 사람들이나 평론가들은 박종용의 작품을 미니멀리즘으로 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사막의 모래에도 무늬가 있다면 바로 작가 박종용에게는 삶의 인문(人彣)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연히 만들어진 색이 아니다. 유리질과 안료에 뒤틀리며 빛과 캔버스에 착상된 궁합이며 작가의 심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시간 기록이라는 점이다. 그의 작품은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묘사점이다. 겉으로 드러난 정성과 노력에 비하여 보이지 않는 시간의 공이 훨씬 더 많이 내재된 작품이 박종용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특히 풀을 엮어 천을 만들어 늘어뜨린 천위에 점철된 규칙적 오브제의 상징성에는 소름이 돋을 정도의 놀라움이 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는 표현은 이런 때 필요하다.


 

미국 나사가 수학의 힘으로 과학법칙과 존재 의 의미를 밝혀 낸다면 박종용은 자연의 침묵과 그에 매우 가까운 교감에서 천행의 이치를 밝혀내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곧 Das Ding이다. 이는 곧 물성의 철학적 지칭어이며 인간이 아닌 물체에서 발견되는 질서의 철학이다. 굳이 ‘유레카’라 이름 붙일 일이 아니다. 그저 우리 이웃에 콘크리트만 존재하지 않고 물과 풀숲이 함께 존재한다면 박종용의 물성 의 세계와 그들과의 교감은 사라지지 않을 그 무엇이다. 그가 서울이 아닌 인제에서 둥지를 틀고 작업하는 덕에 그것의 수많은 활기참이 등장하는 전시의 역동성이 전개 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과 도시에서 유행을 따라 간다면 해 내기 힘들었을 박종용의 새로운 우주 질서의 인간적 표현물을 또 다시 제시하게 될 그 공간은 ‘백공’미술관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의 그림과 미술 작업을 보는 관객은 다음 전시가 기대되는 것이다. 자연에서 얻어와 ‘턱 턱’ 던져 놓은 오브제와 회화의 깊은 속삭임은 도시에서 살던 감성으로는 ‘더 긴장하며 내면에서 찾고 새로운 질서와 흔적을 가슴속에서 끌어내야’ 보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의 그림과 그의 미술 작업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공부라는 마음 수양이 동반되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 준비를 거치면 박종용의 작업은 놀라운 수련과 내공의 미학이 종합된 것임이 보일 것이다. 어쩌면 많은 이에게 그의 그림과 그의 작업 이해에는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전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더 분명한 것은 박정용의 흙이 빚어낸 은백색의 신기루와 가끔 번개 치듯 붉고 푸르게 내리 쪼이는 인문색의 엑센트는 수천 건의 바이블 경구이며 천자문이며 불경에 다가서는 교훈들이다.


 

삶의 미생들을 품은 흙으로 존재하는 과정의 순간을 포착한다. 흑자체의 변형인 것이다. 흙에서 변화 한 모양만 변형되어 유리, 철, 도자등으로 멈추어 있을 뿐 내면의 물성은 변치 않은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근원을 미술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바는 고결함이나 우아미 등의 이론과 규격을 읽는 수사들이 고정된 함의는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지성이 감천하고 순간과 시간에 충실한 창작자의 땀방울만이 있을 뿐이다.

빙하의 얼음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짙푸른하늘색이 보이듯 그의 흰 그림을 보다 보면 청풍에 깃든 성품과 그 맑은 점들에 맺힌 결정체가 보일 것이다. 이름하여 ‘이름 없는 것들의 이름’이 된다.

 

흰색에서 회백색으로 그리고 마침내 점에서 덩어리로 변해간다. 흙에서 돌로 변해가는 시간과 그 이미지와 마주하게 된다. 저 가지런한 천년고찰 나무가 만들어낸 이끼무늬와 그것을 빛으로 말려 화해 놓은 균열을 보자. 또 물을 만나 색이 바래지고 덫칠 되어진 시간의 흔적을 보자.


 

박종용작가가 다음 전시에서 깨닫게 되어 들고 올 보여주기의 수행결과가 궁금해진다. 그러나 조급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이 막연한 믿음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가?

<강익모 에이스ace컬럼니스트. 전시미학평론가. 서울디지털대학 문화예술학과 교수>

강익모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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