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의 제176회 정기 공연은 <마타하리>로 올려졌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바탕으로 파울로 코엘료의 장편소설 <스파이A espia>를 골격으로 삼았다.
<스파이>라는 실화 극화 소설은 100년의 기간동안 문학가, 공연에술가, 전시관련가, 영화인들으,ㄹ 설레게 한 콘텐츠이다.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한 공연은 분명하게 호불호가 갈린다. 고증을 잘 못하거나 너무 흔하게 알려진 바를 주제로 선택하면 그 뻔함 때문에 고충을 치르는 경우가 많다.
국립발레단(단장 강수진)의 <마타하리>는 코엘료 소설 <스파이>의 처음과 끝을 뒤바꿔 극적 구성을 이어 갔다. 옥주현이 주연을 맡은 뮤지컬 <마타하리>의 초연버전은 대다수의 영화를 기본 콘텍스트로 한 공연이 그렇듯 영상의 무대화로 극적인 측면을 구체화 시킨 것이다. 그에 반해 발레 <마타하리>는 충실하게 코엘료의 소설을 따라 문학적인 측면과 쇼스타코비치 곡의 기본 골격을 따라 레나토 자밀라 안무의 전략적 무대와 상징화 공식을 잘 엮어 낸 것이다. 이는 충분한 사전 작업 검토와 앞서 언급한 뻔하지 않은 이야기로의 노선을 추구한 데에 따른 것이다.
레나토, 그가 기용한 알렉산드로 카메라의 무대나 칼 라코티의 의상, 세르조 매달리의 영상은 101년 전 이 이 추위 속 마타하리가 총살 형에 이르는 과정을 섬세히 시간 순으로 연출해 내었다.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강수진은 쇼스타코비치의 일 막 기저가 되는 교향곡 제10번과 2 막에 사용된 교향곡 제 5번을 강조했다. 이는 안무가 레나토 자넬라와의 슈투트가르트에서 쌓은 인연이 결실을 맺은 코드와 일치한다. 서로 충분한 이해와 상대에 대한 신뢰는 이처럼 초연 무대를 이끌어 내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에술감독과 안무가가 강조한 발레곡의 힘은 이 작품이 한국에 소개된 연결 과정과 진행추동에서 공동의 역할이 있었음을 자연스레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마타리는 코엘료의 <스파이> 소설 외에도 만화, 영화, 뮤지컬, 발래로 연동되는 창구효과(Window Effect)에 손색없는 콘텐츠로의 가치를 보여줬다. 흔히 영웅적인 스토리와는 비켜 선 비극적인 엔터테이너를 기리는 일은 허다하지만 <마타하리>는 그 해석에 다라 독특한 아우라를 갖는다.
백 일 년이 흐른 지금 차가운 생라자르 감옥 12호 방을 나와 형장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겨누는 사형 집행 총구를 노려본 장면은 매우 극적이다. 코엘료는 이 장소에 나오게 되는 12호 방을 첫 머리에 서술하였고 검은 실크스타킹과 가죽장갑, 실크끈이 달린 펠트모자 등을 마지막으로 챙겨 입는 과정을 묘사하며 그녀가 형장에 들어서는 순간에도 무용수로서의 고고함을 드러낸 장면(Paulo Coelho, 스파이, 문학동네, 16~17쪽)이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그녀의 마지막 고집이라고 본 것이다. 이 아이덴티티를 지키는 캐릭터의 육체적 고혹을 발견한 것이 바로 발레 <마타하리>다.
코엘료가 자세히 거론하는 바로 이 첫 장면이 <마타하리>라는 발레 작품에서는 가장 마지막 장면에 극적인 효과를 드높인다. 보통 눈을 가리는 사형수의 비참한 모습을 거부하고 그녀 자신을 겨누는 총구를 노려본 눈동자를 일컬어 '마타하리'라 불렀다. 즉 <여명의 눈동자>인 것이다.
코엘료는 <스파이>에서 첫 장면 그리고 안무가 자넬라라는 마지막 장면에서 퍼포밍 아트의 정의인 "시간적 연대기 순에 의한' 감동과 비극이 주는 교훈을 선사하고자 각자의 방식으로 강조했다. 특히 발레에서는 마타하리로 분한 김지영과 박슬기 신승원이 각기 다른, 자유와 분노, 속박과 구속으로부터의 해탈을 연기해 낸 표현력을 보여주었다. 이는 동양인의 몸동작이 갖는 생동력이 강한 감정 표현을 서양 안무가의 구상으로 극대화 하여 되살리게 한 케이스다. 특히 남성 무용수에 의하여 떠 받들어져 공중에 두둥실 든 마타하리의 육체는 비단 육체로서가 아니라 자유의 영혼이자 고뇌에서 해방된 그녀의 환상을 상징한다. 그저 남성 무용수들이 여성무용수의 몸을 지탱한 것이 아니라 공중, 착지, 회전, 카타칼리의 세세한 동작까지 계산하고 관절하나까지 구상된 동작으로 꾸며 낸 것이다.
'마타하리'의 네덜란드 레이우아르던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마르하레타 헤이르트 라위다 젤러라는 긴 이름이다. 그녀는 이 이름의 이력처럼 길고 다양한 캐릭터와 삶의 변주를 이어갔다 . 그것은 주로 회한이고 불완전이며 미충족이었다. '여명의 눈동자 마타하리'라는 이름의 생성은 바로 동트기 전 총구를 노려 본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싸워 온 비극과 절망 분노와 회한을 상기 시키고 하늘의 뜻에 귀의 하는 무희의 기도하는 표정이었던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또 연기자로로서의 세 무용수와 뮤지컬의 옥주현 등이 보여준 동양적 마타하리 일깨우기는 매 장르마다 색다른 그녀 이름으로 태어나기에 손색이 없었다.
여러 장르의 마타하리는 텍스트와 대사, 언어를 사용하여 허와 실, 스릴과 관능의 처리가 가능하엿지만 가장 시적인 발레는 그저 단순한 몸 동작과 연기만으로 일생의 변화와 환경에 따른 그녀의 미소와 우울, 두려움과 광기 등을 표현해야 했다. 그 예가 누군가로부터 자녀들을 독살시키겠다는 협박을 받을 때 '말 못하는 벙이라 냉가슴'의 표정보다 더 잘박함을 표해 내야 하는 무용수의 숙명이 말처럼 전달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공연전부터 국내 초연이라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무용수 마타하리는 속박으로부터 살아남고 가난과 남편의 폭정으로부터 이겨내고자 했으나 결국은 간신히 살아남은 딸 하나와 그곳을 떠나 파리로 향해야 했다. 그가 충실히 살았던 지역을 떠나서 파리로 가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뒤늦었지만 춤을 향한 자아를 찾는 일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발레와 같은 춤을 추는 사람들의 욕망과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열정과 닮아 있다.
마타리는 동트기 전 비극과 절망 분노와 회한을 상징하는 그녀 이름과 함께 묻혔으나 백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그녀는 되살아 나고 있다. 그것은 무희라는 뜻의 '라 바야데르'이며 그 작품 속 명령들의 춤 처럼 손색 없는 상상과 교훈을 주고 있다. 마타하리라는 이름의 동명 스파이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현재의 강대국들은 모두 고급정보망을 가졌으며 더욱 빈번한 교류와 정보임무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녀가 파리 기메 박물관에서 인도의 무희처럼 자신이 어릴 적 동경한 춤(자바섬)의 원형을 찾을 당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는 물랑루즈였다. 파리에서 헤이그와 아른 하임의 마지막 공연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징정한 춤추기만을 갈망했다
이를 이용한 뭇 남성들인 장교, 장관, 외교관, 사업가들은 그녀의 춤을 향한 갈망 보다 전쟁의 광기 속에서 여성의 몸과 정보에 더 관심을 두었다. 시대적 아픔은 남성에 기대어 보호 받는 존재로 그쳤던 당대의 특수성이 더 큰 죄몫을 잉태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를 이겨 내고자 했다. 이 어려운 줄거리와 그녀의 삶과 주변인물들을 국립발레단원들의 몸과 호흡 표정 연기에서 절절이 배어 나올수 있게 한 것은 연습이다.
모든 연습의 대상들은 바로 한 여성과 그녀가 겪는 고통과 아픔이었다. 그녀가 죽음 앞에서까지 바라고자 했던 그것을 절절히 표정과 몸의 동작으로 묻어 나오게 한 것은 무용수들의 관록이 점점 시간의 흐름과 트리플 캐스팅으로 다양화 된 측면이 크다. 벨 에포크 시대에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뤼스와 함께한 니진스키, 파블로바, 스트라빈스키 피카소 등과 같이 이름을 등재하고자 한 열망을 가진 그녀의 단순함은 가장 직선적이면서도 가장 내면적인 것이라 무대에서 김지영, 박슬기, 신승원의 컬러로 변주되었다. 첨언하자면 신승원의 깊이 있는 우수와 좌절을 표현하는 연기는 다시 더 볼 기회가 있다면 오페라 글라스를 반드시 챙겨 갈 것이다.
사랑받고 가장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 여성의 가치이지만 마타하리는 충을 통한 자유와 존재감이 바램과 희망의 전부였지만 당시 서구의 동양적 색채에 대한 이국적인 신비감이 각광 받듯 그녀는 전쟁이라는 서양의 혼돈에서 눈에 띈 엔터테이너로 등극된 것이다. 이는 기득권을 가진 파리 사교계와 예술계사람들이 그녀를 경쟁자나 같은 예술가로 편입되기를 거부한 시대적 상황도 더불어 표현한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이국적인 신비감이 섞인 '포르 드 브라'를 동양인 세 마타리 주역들은 서영의 마타하리보다 더욱 더 절절하게 표현해 낸 것은 두고 두고 국립 발레단의 약진을 증명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들 세 마타하리 주역과 <마타하리>에 등장한 수많은 조역들은 충실하게 색채와 몸의 움직임이 주는 조합들에 대한 라 브레비를 충분이 잘 이해 한 덕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써 국립발레단의 제176회 공연은 한마디로 정리하고자 한다면 '라 브레비La vraie vie)'즉 '진실한 삶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비단 <마타하리>만이 주인공이 아닌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간접 시사하는 경우일 수도 있다.
<강익모- ace컬럼니스트, 공연에술평론가, 서울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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