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선수에게 이렇게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까? “금메달을 원하겠는가? 아니면 사랑하는 남자를 우선 원하겠는가? 둘 중 하나만 우선 5분안에 택하여야 한다면?” 연락을 해봐야겠다. 지난 2월에 끝난 동계올림픽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며 국위를 선양한 김연아선수에게 물어볼 말은 딱 한마디였다. 물론 이 영화를 같이 본다는 전제로 말이다.
계속해서 광고를 찍고 켐페인에 참여하면서 명예와 부를 같이 거머쥐는 김연아선수에게는 이 질문은 우선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금메달을 목에 걸어보았고 피겨 여왕의 권좌에 올라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루머이건 진실이건 간에 그녀는 하키선수건 아이스피겨 선수건 상관없이 아직 싱글로 사랑이나 스캔들보다는 여전히 피겨와 연관된 행사와 같은 동질감을 지닌 광고에 출연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좌에 오르고 싶고 어릴적부터 꿈꾸어온 빙판위에서 자신을 불사르고 싶은 나디아에게 이 질문은 유혹과 고민 투성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아이스>같은 스포츠선수를 다룬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포커스를 챔피언에 오르는 과정과 그 여정에서 닥치게 되는 불행과 그 고통에 초점을 맞추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은 일류에게 엄청난 역동성과 용기, 긍지와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온 소녀 나디아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피겨스케이팅을 탄다. 그리고 러시아 대표선수로 발탁된다. 영화 <아이스>의 초반부 이야기는 너무 쉽게 메달권에 진입하고 파트너를 만나 남녀듀엣으로 출전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피겨선수들은 인간적인 호흡과 밀접한 동료애를 밀착해 쇼로 보이는 과정을 중시해서일까? 아니면 찰떡 같은 궁급을 맞추려는 경향이 강하고 필요하기 때문일까?
러시아의 남자대표선수와 모스크바로 가서 오디션을 본 변방의 소녀는 금세 연인이 되고 경험이 출중한 러시아 선수의 후광에 힘입어 국가대표 선수가 된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하던가?
백설공주와 여왕 소리를 듣고 평생을 살 것 같던 그녀에게 금전과 명예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정신과 육체적인 그녀의 모든 것을 가져간 러시아 대표선수는 각종대회출전을 핑계로 몸이 멀어진 만큼 마음마저 멀어져 간다.
영화를 같이 보는 관객에게 당신이 이 여성이라면 어떻게 하고 싶으냐고 묻고 싶다. 영화 <아이스>는 전혀 다른 차원의 아이스 빙판을 보여준다. 원제<АЁД>는 러시아어로 ICE에 해당한다. 차갑고 냉기조차 얼어버린 빙판에 누워 “쩡쩡”얼음이 갈라지는 소리를 들으며 크랙이 그려내는 소리와 더럽은 호수얼음의 빙질무늬는 이 영화가 주는 상징적 질문이자 고민의 주제이다.
즉 나디아와 사샤, 두 사람의 선수는 바닥에 드러누워 서로 손을 잡고 고민하며 그저 부상에 겨운 숨을 헐떡 거릴 뿐이다. 이때 가까이서 들리는 얼음이 갈라져 호수가 벌어지는 상황에 놓이지만 더 없이 넓은 빙판의 동질감들은 균질에도 불구하고 서로 얼음조각으로 맞닿아 있으면서 뜨거운 햇살을 받을 때까지 조각 얼음이 아닌 빙판으로서의 평원을 유지하는 것이다.
여덟 살 때까지 피겨를 했던 사샤는 고집을 피우며 아이스하키 선수로 전향하였고 다혈질이자 뒤지는 것을 싫어한 나머지 주먹이 혈기왕성한 말썽을 피우다가 소녀를 만난다. 그 소녀는 어릴 때부터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학교의 담임교사에게서 들었던 열등성적꾼이라는 지적을 코치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정작 코치의 말을 뒤바꾸어 딸에게 전달한다. “네가 아주 가망성이 있대. 그리고 노력하면 너는 아이스컵 우승자가 될 거래!” 소녀는 어머니를 믿었고 순박했다. 은반 위의 여왕이 되는 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노력을 이어나가려면 누구나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이 영화 <아이스>는 지극히 당연한 이러한 교훈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얼음이라는 것이 열을 가하고 더운물을 부으면 녹을 수 있듯이 사람의 인생도 얼수 있고 이것을 더워지게 하려면 단순한 고난과 극복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동기’와 ‘동반자’라는 두 단어의 조합이 형성되어야 함을 의외의 장면에서 보여주는 영화다. 아이스는 스릴과 흥미위주의 영화만 보아왔던 관객들에게는 보기 힘든 생소한 영화이지만 러시아의 톨스토이와 같은 대문호와 차이콥스키를 비롯한 음악인들이 탄생한 배경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근본을 강조한 영화다. 실제로 로스트로포비치 등의 유려한 음악은 심금을 울리다 못해 스포트 라이트 아래 반짝이는 은반을 더욱 빛나게 한다.
영화가 2017년이 아닌 2018년에 우리에게 다시 찾아온 이유를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다.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당연히 금메달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경제가 어려워지고 정치가 어려워지는 때일수록 <아이스>와 같은 영화가 가지고 있는 사랑과 도전 그리고 불굴의 좌절을 응원하는 국민과 관객의 시선은 오히려 더욱 뜨거워진다는 지극히 평범함을 보여준다.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는 태도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비단 스케이트 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강익모 -ace컬럼니스트, 영화평론가, 서울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부교수>